우리는 어떤 '쥐'를 호감으로 보는가?
💭 일기 – 혐오에서 호감으로: 존재를 다시 보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그리고 그 감정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때로 그것은 익숙하지 않음에서, 혹은 오래도록 주입된 관념에서 비롯된다. 쥐, 벌레, 특정한 사람, 혹은 사상까지, 우리는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거리를 둔다. 하지만 나는 문득, 한 가지 질문을 품는다. ‘그 혐오의 감정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에서 레미라는 작은 쥐는 우리의 혐오를 호감으로 바꿔놓는다. 한낱 오물 더미에 서식하는 동물이 아니라, 요리에 열정을 품은 존재,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꿈꾸는 존재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를 ‘사람’처럼 느낀다. 인간적 특질이 부여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자를 다시 본다. 이때 공감은 두려움을 이기고, 혐오는 물러선다.
혐오의 본질은 맥락에 기대어 있다. 쥐를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시선은 하나의 문화적 해석일 뿐,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레미는 그 맥락을 전복한다. ‘쥐 = 창의적 요리사’라는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과거의 이미지는 서서히 희석된다. 감정은 이야기로써 다시 쓰인다. 결국 감정의 전환은 맥락의 전환과 궤를 같이 한다.
외형 또한 중요하다. 둥근 눈동자, 부드러운 색감, 순한 표정—디자인은 인식을 바꾼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감정을 직관하며, 그 직관이 인식을 주조한다. 추한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일, 혐오의 대상을 ‘다르게’ 그리는 행위는 하나의 미학적 저항이다.
무엇보다 이야기는 존재의 의미를 덧입힌다. 레미는 단순한 쥐가 아니다. 그는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려는 이야기의 주체이며, 타자성을 끌어안는 상징이다. 혐오에서 호감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감정의 변덕이 아니라, 존재를 수용하려는 내면의 확장이기도 하다.
생각해 본다. 나의 일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기피하고,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내가 마주한 낯설고 불편한 타자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혐오는 때로 무지로부터 비롯된다면, 호감은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존재를 다시 보는 그 순간, 우리는 조금씩 다르게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내 안의 혐오를 살핀다. 그리고 조심스레 되묻는다.
내가 외면한 것들 속에, 혹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도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혐오에서 호감까지(2026.01.14.)